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 라단조 Op. 47 / Dmitiri Shostakovitch Symphony No. 5 in D minor, Op. 47
이 교향곡은 그의 15개 교향곡 중 제7번 ‘레닌그라드’와 함께 가장 유명하며, 그의 교향곡 중 가장 많이 연주되는 곡이다.
이 교향곡을 들을 때 마다 베토벤의 교향곡 5번과 말러의 교향곡 5번과의 연관성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는데, 베토벤이나 말러가 개인 (혹은 확장된 인간)의 운명에 대한 승리를 확신했다면, 이 곡은 폭압적이고 전제적인 소비에트 스탈린주의에 대한 개인과 예술의 승리를 확신했다는 생각이 든다.(이 부분에 있어서 개인적인 판단은 작곡가들에 대한 전기와 음악적 배경이 크게 작용한다.)
1928년 스탈린이 제1차 5개년을 시작하면서 스탈린주의가 지배한 그당시 소비에트 문화는 철저히 통제 되었으며, 인민들이 사실적인 예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공산체제 선전을 위해 사실적인 예술 운동 즉 사회주의 사실주의( Socialist realism) 운동이 본격화 되었다. 이 당시 재즈, 전위음악은 서구적 자본주의의 부패음악으로서 추방되었으며, 심지어 무소르크스키, 보로딘과 더블어 슬라브주의에 바탕을 두었지만 서구적 음악기법을 사용한 차이콥스키의 음악조차도 탄압을 받기 시작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 운동은 쇼스타코비치에게도 빗겨갈 수 없는 운명이었는데, 그의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과 그의 발레음악 ‘맑은 시냇물’2개의 작품이 서구적 자본주의 형식에 물들은 형식적인 작품이라고 신랄하게 매도 되었다. 특히 1936년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을 관람한 스탈린은 매우 분노했었다. 오페라의 내용이 불륜으로 인해 남편을 살해하고 유형지에서 연적의 여자 죄수와 자살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분노한 스탈린에 의해 공산당 기관지인 프라우드에 의해서 쇼스타코비치는 ‘인민의 적’으로 낙인이 찍였다.
스탈린의 구소련의 정치,경제,문화, 예술에 대한 공포스러운 탄압은 그의 자의성 덕분에 특히 효과적이었는데 과학자부터 예술가에 이르기까지 모든 자유 사상가는 하루 아침에 희생자가 될 수 있었다. 따라서 쇼스타코비치 또한 스탈린주의의 폭력성에 대한 공포에 질려있었음은 말 할 필요도 없다. 1937 년 4 월 교향곡 5 번 작업을 시작했을 때 그에 대한 위협은 절정에 달했었는데 쇼스타코비치의 삼촌과 처남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여동생 마리야는 시베리아로 추방되었다. 이러한 공포스러운 분위기에서 쇼스타코비치는 염세적이며 고독한 분위기의 그의 교향곡 4번을 포기하고, 자아비판을 통해 1937년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반영된 그의 제 5번 교향곡을 발표한다.
이 교향곡의 발표는 1937년 11월 21일에 므라빈스키의 지휘 레닌그라드 필의 초연으로 이루어졌는데, 암울하고 비극적인 (특히 1악장과 3악장)에 대해 당당한 행진으로 승리하는 마지막 악장으로 인해 전에 없던 환호를 받았다. 연주가 끝났음에도 객석에서는 30분간 환호와 박수가 이어졌으며, 사람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기 위해서 소등한 다음에야 조용해 졌다라는 에피소드가 있다. 이에 대해 쇼스타코비치는 ‘당국에 대한 한 소련 예술가의 응답’이라고 언급했다. 이에 대해 소비에트 당국은 소비에트 볼세비키 혁명을 찬양한 음악이라고 인정했으며,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극치라고 찬양했다. 그러나 후에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의 앞부분에 대한 어두움은 스탈린 체제하의 인민들의 고통을 표현한 것이다’라고 밝혔듯이 이 교향곡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충실한 곡이 아닌 스탈린주의에 대한 고발이자 조롱이며 반항인 것이다. 또한 힘없는 한 예술가가 거대하고 폭력적인 전체주의적 권력에 맞선 예술과 본인 생명에 대한 외줄타기인 것이다. 그리고 이 교향곡은 모든 정치적인 요소를 고려해도 예술적으로 너무나도 탁월하다.
첼로의 거장 로스트포비치는 회고록에서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쇼스타코비치는 우리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거울같이 생생하게 묘사한다. 만일 그가 말이나 언어로 이를 표현했더라면 바로 숙청을 당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음악은 추상적인 예술이다. 특히 바보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당시 소련 당국은 완전한 바보들이었기 때문에 그의 진정한 의도를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공산주의라는 이상적인 이론 속에서 고통을 당하던 우리들에게는 오히려 음악의 추상성이 더욱 생생한 현실을 묘사해 주게 된 것이다.’
쇼스타코비치는 한때 서구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타협한 작곡가로서 비난을 받았지만, 그것은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스탈린 사회에서 생존과도 직결된 힘없는 예술가의 외줄타기 였으며, 당에 찍히면 다음날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는 공포에 짓눌린 상황을 이해한다면 그 누가 그에게 정치적 견해로 비난을 할 수가 있을까? 또한 매카시즘이 자리잡고 있던 한국의 1980년대까지 쇼스타코비치와 그의 음악이 금기시 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폭력적인 정치권력 보다는 예술의 생명은 길다. 그것도 엄청나게.
그리고 이 교향곡 5번은 베토벤의 위대한 교향곡 제 5번의 20세기 버전이다!

제1악장 : Moderato-Allegro non troppo-Moderato
베토벤과 말러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악장이며, 처음부터 매우 느리고 어두우며 공포감이 스며든다. 이런한 분위기에 갑작스러운 알레그로(빠르게)는 급박한 긴장감을 도입하는데 호른과 트럼펫의 기묘한 멜로디에 저음으로 연주하는 피아노의 리듬은 군복을 입은 권력의 행진을 느끼게 해준다. 솔로바이올린의 슬픈 멜로디와 첼레스트타의 상승하는 마지막 부분은 기묘하면서도 아름다운 느낌을 받는다.
제2악장 : Allegretto
당대의 비평가들에 의해서 2악장은 말러풍의 왈츠와 유사하다고 지적 받는다.
1악장의 분위기와 다른 흥겹고 즐거운 멜로디와 리듬으로 시작된다. 1악장이 어둡고 비극적인 선율에서 비극적인 행진곡풍의 선율로 진행이 되었다면, 2악장은 흥겨운 무곡 분위기에서 갑작스러운 행진곡풍으로 마무리된다.
제3악장 : Largo
특히 이3악장은 현악기의 섬세한 표현이 뛰어난다. 그의 교향곡 중 가장 아름다운 악장이라고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 악장 또한 매우 어두운 분위기다. 시간이 흐르며 첼로 파트의 깊고 격한 감정의 클라이막스를 지나 격한 감정은 소멸해간다.
제4악장 : Allegro non troppo
목관악기, 금관악기 그리고 팀파니로 개시하는 이 악장은 충격적이며, 베토벤의 음악적인 승리의 악장을 듣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에서는 자본주의에 대한 인민의 승리라고 착각했겠지만, 쇼스타코비치에게는 스탈린주의 대한 인민의 승리를 희망한 악장이다. 추상적인 음악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는 없겠지만 부조리한 현실을 바꾸게 할 수도 있는 마음의 씨앗을 품게 할 수 있는 것 같은 마음이 든다.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의 명연주 명반들은 다음과 같이 꼽고 싶다.
우선 므라빈스키 지휘 레닌그라드필의 1984년 녹음은 바이블이다. 그는 4번 녹음했는데, 1984년 녹음이 ( ERATO 레이블)이 최고의 명반으로 선택할 수 있다.

레너드 번슈타인 지휘 뉴욕필 ,
번슈타인 답게 매우 자유로우면서 극적인 해석을 보여준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서 템포를 느리게 가지고 가는데, 쇼스타코비치도 이 해석에 매우 만족했다고 한다.

베르나르드 하이팅크 지휘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우 오케스트라 ,
번슈타인과 함께 서구에 쇼스타코비치를 소개한 뛰어난 지휘자로 번슈타인 해석 보다는 중립적이고 견실한 연주를 들려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