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인적으로 모든 종류의 음악을 좋아하지만, 클래식 음악에 한정했을 경우 클래식 입문 후 브루크너 교향곡 8번을 만나기 까지는 참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다.
말러나 쇼스타코비치도 그렇지만 돌이켜보면 브루크너 음악 또한 음악적 내공이 없으면 전혀 재미없는 음악이다.
나에게 있어서 20-30대까지는 음악적 내공이 없었는지, 브루크너 음악은 관심 밖이었다.
브루크너 음악은 모차르트나 슈베르트처럼 결코 감상하는 사람에게 절대 친절한 음악이 아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귄터 반트의 브루크너 교향곡 전집을 듣지 않고 한동안 모셔만 놓았으니!
처음에는 브루크너 음악을 들으려면 들어보겠다는 작심과 그리고 기나긴 인내심이 필요하다.
마치 높은 산을 오르려고 준비하는 사람처럼 결심을 해야한다.
바쁜 현대인에게 있어서 교향곡 한곡을 듣기 위해서 적어도 연주시간만 최소 1시간 이상에서 100분까지 투자하는 것은 쉽지 않은일이다.
그러나 정상에 오르면 오른 모든 사람에게 브루크너 음악은 기나긴 인내심에 대한 보답을 반드시 한다.
그것이 황홀이라 부르던 카타르시스라 부르던 혹은 마치 뇌로만 느끼는 순수한 정신적인 오르가즘이라고 부르던 - 그 어떠한 언어로 정의하기 어려운- 정신적인 체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정신적인 체험이란 음(音)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쓰나미 같은 형태의 것이다.
8번 교향곡은 브루크너의 최후의 완성된 교향곡이자 (9번은 미완성), 가장 깊이 있는 교향곡이며 또한 가장 긴 연주시간을 필요로 하는 대곡이다.(오케스트라의 관현악 연주자들에게는 이 곡을 연주하기 위해서는 쉬지도 못하고 100분 내내 노가다를 해야만 한다. 지휘자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이 곡을 들을때마다 브루크너뿐만 아니라 지휘자와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도 감사함을 느낀다.)
서양음악에 있어서 이 8번 교향곡의 위치는 하이든, 모차르트에서 시작한 교향곡이라는 형태가 베토벤을 거쳐 최고의 절정의 순간에 다다른 곡이라고 생각이 든다.
바그너의 영향을 받은 대규모 편성, 과감한 화성 이런 것을 뛰어넘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그 무엇이란 무엇일까?
이 곡 또한 브루크너 음악의 트레이드 마크인 브루크너의 도입(현악기의 트레몰로로 시작), 브루크너의 휴지 (다른 선율로 이동시 멈춤), 브루크너의 리듬(4분 음표 두 개와 삼연 음부로 구성된 리듬)이 나타난다.
제1악장은 현악기의 트레몰로로 시작하여 비장한 제1주제가 나타나며 이 주제가 전곡을 지배한다. 제2주제는 밝으며 서정적이다.
제2악장은 스케르쪼 악장으로 브루크너의 스케르쪼 악장 중 가장 길다.
제3악장은 매우 느린 아다지오 악장으로 그 음악적 깊이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감정의 정도가 깊다.
제4악장은 행진곡풍으로 시작되어 마지막 클라이막스(이 클라이막스에서는 1악장부터 농축된 음(音)의 에너지가 쓰나미처럼 밀려온다)에서는 이 거대한 교향곡의 결말을 고한다.
판본
브루크너 만큼 창작한 자신의 작품을 여러 번 개정한 작곡가도 드물다. 또한 그의 악보는 그의 제자들에 의해 개정된 여러 판본이 존재한다.
그것은 노바크판, 하스판, 샬크판이다.
대부분의 지휘자는 노바크판을 선호하지만, 귄터 반트, 카라얀, 티엘만, 볼레즈는 하스판을 사용한다.
말러의 경우 일반적으로 추천하는 지휘자는 ABC (클라우디오 아바도, 레너드 번슈타인, 리카르도 샤이)이듯이, 개인적인 브루크너 추천 지휘자는 WJC (귄터 반트, 오이겐 요훔, 세르지우 첼리비다케)이다.
이 외에도 명지휘자는 많다. 틸레만, 볼레즈 지휘도 좋다.
이러한 비교가 맞는지 모르겠지만 귄터 반트의 해석이 부르크너 해석의 바이블이라면, 첼리비다케의 해석은 동양의 선(禪)적인 체험과 같은 해석이다. 아래에 유튜브 영상을 링크해 놓았다.



Bruckner Symphony No 8 Celibidache Münchner Philharmoniker Live Tokyo 20 Oct 1990